논터뷰인터뷰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 “전광훈 목사처럼 청와대 진격 구호 외쳤어도 안잡아가는게 민주주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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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재현기자 댓글 0건 조회 8,279회 작성일 19-11-22 15:31본문
<리포액트>가 ‘사람 인터뷰’ 기획을 시작합니다. 기획의 제목은 ‘논터뷰’입니다. 단순히 말을 듣고 전하는게 아니라, 때로 논쟁하고 반박하는 인터뷰입니다. 우리 사회 존경받는 인물과도 만나겠지만 논쟁적인 인물도 만나 독자 여러분 대신 논쟁해드릴 것입니다. 기자는 말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직업인이기도 하지만, 올바른 여론의 방향을 찾아가는 나침반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라 ‘논터뷰’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논터뷰의 첫 주인공은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입니다.
한상균 전 위원장(57)과 허재현 기자(39)와의 인연은 좀 오래됐습니다. 처음 만난 건 2009년 쌍용자동차의 일방적 정리해고에 맞서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 투쟁을 벌이던 평택의 공장에서였습니다. 그때 여섯명의 기자가 공장안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먹고 자고 했습니다. 경찰의 무력 침탈이 언제 닥칠지 몰라, 몇몇의 호기로운 기자들이 그 현장을 기록하고자 잠복해 있었습니다. 그때 허 기자도 함께였습니다. 당시 조현오 경기경찰청장이 지휘하던 경찰특공대는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던 노동자들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당시 한겨레의 기사로 현장을 가감없이 보도했지만 되레 조현오는 경찰청장으로 승진하고 한상균 당시 민주노총 쌍용차자동차 지부장은 감옥에 갔습니다.
한 전 위원장을 다시 만난 건 2015년 겨울 조계사에서였습니다. ‘해고 노동자 한상균’은 그때 민주노총 위원장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 시도와 역사교과서 퇴행’을 반대하기 위해 민주노총 주도의 민중대회가 열렸는데 이 때문에 경찰은 한상균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을 수배했습니다. 혐의는 집회및시위에관한 법률 위반 및 소요죄. 한상균 위원장이 집회장에서 “청와대로 진격”을 외쳤다는 이유였습니다. 허 기자는 조계사에 피신중이던 한상균 위원장을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이후 그는 다시 감옥에 갔고 그렇게 인연이 끊기는 듯 했습니다.
허 기자는 2018년 5월 마약 투약이라는 불행한 사건을 겪고 한겨레를 떠나야 했습니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2018년 5월 출소했습니다. 한 전 위원장이 먼저 허 기자에게 “만나자”고 얼마전 연락을 해왔습니다. 노동자 한명 한명의 아픔을 제 일처럼 챙기던 따뜻한 품성의 한 전 위원장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차마 그에게 먼저 연락하지 못하고 있던 허 기자에게 그는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한 전 위원장과 인터뷰가 성사되었습니다. 그는 곧장 허 기자를 김치찌개집으로 데려가 뜨끈한 밥부터 먹였습니다.
-허재현
제가 차마 먼저 뵙자고 연락드릴 용기가 없었는데 먼저 만나자고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한상균
제가 감옥에 있을 때 마약 중독자들 많이 만나봤어요. 다들 착하던데. (웃음)
-중독자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마약 사범들은 수감복의 명찰 색깔이 달라요.
-그런걸 구분해두는 군요.
=네. 사형수들이나 정치범들도 명찰 색깔이 달라요.
-마약 중독자들이 감옥안에서도 구분되고 여러 가지 곤혹을 겪을 수 있겠네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면서 살아요. 우리 사회가 너무 좀 가혹한 편이 있지요.
한 전 위원장은 김치찌개에 담겨 나온 돼지고기를 먹기 좋게 설겅설겅 잘랐습니다. 허 기자는 한 전 위원장 그릇에 국물을 떠주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찌개와 하얀 쌀밥을 앞에 두고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위원장님과 알고 지낸지 10년이 넘어가는데 밥을 같이 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게 조계사였지요?
-네. 감옥에서 나오실 때는 제가 한겨레에서 마침 나오게 되는 바람에 연락도 못드렸습니다.
=그간 허 기자가 해온 것들이 많으니까 금방 자리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명진스님께서 감사하게도 리포액트의 고문을 맡아주고 계세요.
=명진스님은 저도 얼마전 찾아뵈었어요. 항상 우리 사회를 걱정해주고 계신 고마운 원로스님입니다.
한 전 위원장은 2015년 11월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민중총궐기를 주도하고 경찰버스 등을 파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감옥에는 2년6개월을 갇혀 있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소요죄 혐의까지 적용해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했지만, 검찰은 문재인 정권으로 바뀐 2017년 7월 한 전 위원장에 대한 소요죄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 처리했습니다. “어떤 지역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폭행·협박·손괴의 폭력행위로 보기는 어렵다”는 뒤늦은 설명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이 얼마나 무리한 수사를 벌였는지 그 배경은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허 기자는 2018년 4월 경찰이 이명박 정부 때부터 정치 댓글을 달아온 사실을 폭로하는 보도를 한 바 있습니다. 그것도 조현오 당시 경찰청장의 지휘 하에 벌어진 것임이 뒤늦게 드러났습니다. 경찰이 정부의 끄나풀이자 선전 도구를 자임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밝혀진 것이었습니다. 한 전 위원장에 대한 무리한 소요죄 혐의 적용은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장이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공공연히 “청와대 진격, 문재인을 끌어내리자”는 구호 등을 외치고 있습니다. 전광훈 목사가 주도한 보수집회에는 각목이 등장하는 등 폭력적 모습이 자주 연출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 목사는 내란 혐의로 시민단체에 고발당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전 목사는 현재 경찰로부터 출석요구서를 받고 있을 뿐, 한상균 전 위원장처럼 체포 압박은 받지 않습다. 한 전 위원장처럼 어딘가로 피신하지도 않습니다. 이에 대해 한 전 위원장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전광훈 목사와 한상균 위원장은 “청와대 진격”이라는 똑같은 구호를 외쳤지만 전광훈 목사에 대해서는 경찰이 체포영장을 발부받지 않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발전이지요. 저는 그게 옳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런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전 목사가 똑같은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찰이 수사를 하더라도 피의자를 무리하게 옥죄어서는 안되는 겁니다. 박근혜 정부 때의 경찰이 크게 잘못한 것이고 문재인 정부에서의 경찰이 개혁을 한 겁니다. 청와대 앞에서 과거에는 절대 시위가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가능한 시대가 되었지요. 이게 정상인 겁니다.
-민주주의 투쟁을 벌이다 감옥 가는 사람 따로 있고 그 과실을 누리는 사람 따로 있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수구 보수세력도 민주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웃음)
-지금은 수사 받는 거 없나요.
=형이 만료 되고나서도 검찰에서 수사 종결된 내용을 줄줄이 통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까지도 조사했더라고요. 이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한상균 전 위원장은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권리 찾기를 위한 단체 ‘권유하다’의 대표를 맡아 현재 활발한 활동중입니다. 민주노총 위원장으로서의 임기를 감옥에서 거의 다 보낸 한 전 위원장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노동자의 권리증진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민주노총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뛰기 시작한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민주노총같은 노동자 단체가 있는데 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를 위해 ‘권유하다’라는 단체를 또 만든 것인가요.
=감옥 안에서 많은 수감자들과 대화를 했어요. 영세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에 대한 반감과 섭섭함이 매우 많더라고요. ‘당신들은 정리해고나 비정규직 확산에 반대하는 싸움이라도 할 수 있지.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해고되더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떤 때는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당신들(민주노총)이 부럽고 밉기까지 하다’고 하더군요. 1년에 수십번씩 해고당해도 정리해고에 맞서 싸울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입니다.
이건 무슨 말일까요. 우리 사회 근로기준법은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국가가 규제하고 관리하기에는 너무 사업장 규모가 작으니 자율적으로 알아서들 잘 하라는 법 체계입니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자영업자 및 무급 가족 포함)의 규모는 2019년 현재 국내 노동자의 27.0%(58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들은 사업주에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요구를 스스로 해내야 합니다. 노동부가 노사 갈등 중재에 나서거나 근로관리감독을 해주지 않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는 ‘21세기 전태일’이 580만명이나 우리 사회에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민주노총이 이런 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위해 대신 싸워줄 수는 없는 건가요.
=있지요.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지 않은 곳에 노동조합을 세우기 위해 지원을 많이 해요. 또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찾기 등에도 많은 성과를 냈고요. 그럼에도 민주노총이 다 커버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감옥에서 생각했어요. 노동자들 스스로 단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민주노총이 대신 싸워주는 게 아니라, ‘당사자 노동운동’을 벌여야겠다고 말이죠. 한번도 노동운동이란 걸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민주노총이 함께 해줄테니 ‘단결투쟁’ 조끼를 입고 광장에 나오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들 스스로 노동자 권리에 눈을 떠야 해요.
-그래서 단체이름을 ‘권유하다’로 지은건가요?
=노동자 권리 운동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게 아니라 ‘권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닳았어요. 우리는 불완전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대신 싸워주는게 아니라, 설명하고 권유하는 단체입니다.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에요.
-구체적으로 무슨 사업을 준비중인가요.
=가짜 5인 미만 사업장들이 많아요. 실질적으로는 10명 이상 근무하면서 4명만 정직원으로 두고 나머지는 간접 고용으로 돌린다든지 그런 식입니다. 그러면서 근로감독을 피하는 겁니다. 만약 노동자 8명 있으면 네명씩 쪼개서 근로기준법 적용 기준을 피해가는 겁니다. 또 하나는, 등록 노동자와 비공식 노동자가 있어요. 등록 노동자로 등록하려면 근로 계약서를 쓰고 노동자에게 계약서 교부를 해야 해요. 그걸 5인 미만 사업장은 거의 안쓰고 있습니다. 최소한 이런 건 사회적으로 공론화해 바꿀 겁니다.
-영세사업장의 사업주들은 이런 ‘노동자 권리제안 운동’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요. 최저임금 올리는 것을 두고 부담을 느낀 것처럼요.
=그래서 우리가 영세사업장이란 표현보다는 ‘5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법적 용어를 써야 하는 겁니다. 진짜로 영세한 사업장은 있을 수 있지요. 사업장 임대료도 제대로 못내는 사업주들도 수두룩 하니까요. 저희의 권리 제안 운동은 그러한 영세사업주들을 더 어렵게 만들거나, 우리 사회 ‘을들’간의 대립을 부추기려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는 영세하지 않은데 세금을 덜 내려고 ‘위장 5인 미만 사업장’을 운영중인 곳들이 많아요. 그런 곳들부터 고발에 나설 것입니다. 또 ‘플랫폼 노동자’ 들도 현재 노동법상의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요. 결국은 취약한 영세사업주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관련 법들도 많이 바뀌어야 해요. 그런 것도 우리가 함께 제안해 나갈 것입니다.
얼마전 프랑스에서 ‘노란조끼 시위’가 벌어졌잖아요. 어떤 조직된 노동자들의 시위가 아니라, 유류세 인상과 법인세 인하, 고소득층 세금 인하 등 부자 감세에 반대하는 ‘사회 을들’의 대정부 시위였어요. 우리 사회에서도 프랑스처럼 직접 교섭을 벌이려는 기존 노동조직이 아닌 새로운 집단이 많아질 겁니다.
-권유하다에 관심을 갖고 위장 5인 미만 사업장을 고발하려면 어떡해야 하나요.
=관련 누리집을 내년 1월말에 오픈 예정입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논의할 수 있는 온라인 운동장 같은 것이 될 겁니다.
<사진 설명>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인터뷰 도중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한상균님은 원래 쌍용자동차 노동자였잖아요. 다른 노동자들은 다 복직했는데 본인은 왜 정작 복직을 안하나요.
=아직 복직 다 못한 분들이 48명 있습니다. 노사 협상에 따라, 순차적 복직 대상의 후순위로 밀려난 분들입니다. 2020년 1월1일 복직하기로 되어 있는데 저는 그때 함께 복직할 겁니다. 모든 부당 해고 노동자들이 다 복직하고 제가 맨 마지막으로 복직할 겁니다.
-당시 노조위원장으로서 끝까지 책임을 지는 거군요.
=저도 10년만에 평택 쌍용차 공장 정문으로 출근하는 첫날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습니다. 만감이 교차할 것 같습니다. 저는 생산라인에서 일할 생각입니다.
=한국 사회가 정리해고라는 수단을 갖고 기업의 생존만 모색한다면 얼마나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건이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비록 복직해서 들어가더라도, 쌍용차처럼 일방적 정리해고를 당할 위기에 놓인 노동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위원장님 어머니는 요즘 뭐라고 하십니까.
=옛날에 어머니께서 ‘빨갱이 아들’이란 얘기를 듣고 상처도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그런 이야기 하는 사람 없다면서 여한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냥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먼 거리를 돌아가면서까지 평생 싸우는 이유가 뭔가요.
=인간은 경험으로부터 성장합니다. 저는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어요. 그때 본 국가 폭력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잘못된 것은 끝까지 싸워서 바꿔야 한다는 항쟁의 DNA가 몸에 새겨진 것 같습니다. (웃음)
한상균이라는 이름의 한 노동자가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될 때 나이가 마흔 일곱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쉰일곱니다. 복직해도 3년밖에 회사를 다니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중에 왜 중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을까요. 10년은 누구도 버티기에 결코 만만한 기간이 아닙니다. 한상균 위원장처럼 자신이 끝까지 기댈 버팀목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노동자들이 이 악물고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한상균’들이 더 있겠지요. 그런 분들을 더 만나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제보주시면 <리포액트>가 찾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