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터뷰인터뷰 중독회복연대 공동대표 윤현준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대우 교수 인터뷰 “저는 중독자가 아닌 회복자와 일하는 사람입니다. 회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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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재현기자 댓글 0건 조회 1,898회 작성일 24-06-21 13:39본문
매년 6월 26일은 '세계 마약 퇴치의 날'이다. '세계 마약 퇴치의 날'은 1987년 국제연합(UN)에서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마약 남용이 없는 국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지정한 기념일이다. 매년 6월 26일 '세계 마약 퇴치의 날'에 세계 각국에서는 마약류 사용을 근절하고 중독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위해 여러가지 행사와 노력을 하고 있다.
6월 26일 수요일 오후 2시 '중독회복연대'와 '한국중독당사자협회', 더불어 민주당 박주민 ,김윤 ,한창민 국회의원 공동주최로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세계 마약 퇴치의 날' 기념 '탈중독 친회복 포럼'인 '처벌을 넘어 회복을 지향하는 마약정책을 위한 과제'라는 주제로 포럼이 개최된다. < 리포액트 >가 '세계 마약 퇴치의 날'을 맞아 포럼 공동주최인 '중독회복연대' 공동대표 윤현준 교수를 만나 마약류 사용의 위험성과 중독자들을 위한 회복 프로그램 시스템 구축에 대한 의견을 들어 보았다.
아들 기대한 집안 셋 째 딸로 태어나 항상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불편했던 어린 시절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막연함이 미국 유학을 꿈꾸게 해
-이름 때문에 남자라고 오해 받았겠어요.
“할아버지께서 손주라고 장담하셨고 미리 남자 이름으로 지어 놨는데 또 딸이 태어났죠. 어머니는 아들로 생각하시고 태교를 하셔서 그런지 제 성격이 씩씩한 편입니다. 아들을 바랬는데 셋 째 딸이 태어났으니 존재감이 없었죠. 10살 때 우연히 TV에서 삼성 회장인 이병철씨를 보면서 언니한테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나는 이 집에서 잘못 태어난 것 같아. 난 이병철 딸로 태어났어야 했어”라고요. 언니가 제 말을 듣고 그럼 집에서 나가라고 해서 엄마가 오실 때까지 밖에서 기다린 적이 있었어요. 엄마를 기다리면서 “누가 나를 입양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평범한 공무원 집안이었는데도 “우리 집 환경이 내가 더 큰 사람이 되게 도와줄 수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평생의 꿈이 미국 유학이었다면서요?
“70년대 우리는 미국이 꿈을 실현 시킬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죠. 큰 언니가 저보다 11살 위인데 24살에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요. 그때 형부가 저한테 “현준이 공부 열심히 해라. 그럼 미국으로 유학도 올 수 있고 좋잖아”라고요. 그 말이 저에게는 꿈이 된 거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꿈이요. 당시 중학생인 저는 당장이라도 미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9년 동안 미국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순서를 기다리느라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학기 중간에 교수님께 미국에 가서 대학을 다니려고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졸업을 하고 가라고 하셨어요. 교수님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셨기 때문에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가는 것이 미국에 가서 공부하기에 더 편할 거라고 하셔서 1988년 2월에 졸업을 하고 3월에 바로 미국으로 갔습니다.”
우연히 취업한 ‘ASIAN AMERICAN MENTAL HEALTH SERVICES'
중독이 문제가 아니라 중독자들을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돕는 게 급하다는 것 깨달아
-20대에 미국에서 평생의 직업을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가서 사업가가 되고 싶었어요. 사업가가 되려면 미국에서 무슨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college에 가서 CPA(certified public accountant:공인회계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적성에 안 맞고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만두고 뉴욕으로 가서 ‘ASIAN AMERICAN MENTAL HEALTH SERVICES'라는 사회복지서비스기관에서 준사회복지사로 일을 하게 됐어요. 그곳은 만성 정신장애인들을 지역사회에서 서비스하는 기관입니다. 차트를 봤더니 정신 분열증, 우울증 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냥 만나면 환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에게 신체, 심리,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발휘하면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를 하는 곳입니다. 모두 석사 이상의 사회복지, 정신건강복지사들이 서비스를 하고 있었고 이런 일을 꼭 의사들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죠. 당시 제 수퍼바이저인 ‘수잔’은 서비스 대상자들에게는 겸손하면서도 일에서는 정말 전문적인 그런 사람이었어요. ‘수잔’을 보면서 저도 이런 일을 하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거나는 자신감도 생겼고 사회환경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모든것은 자신의 책임이고, 그 상황을 극복하는 것도 자신의 몫인 사회였잖아요, 수치감, 패배감 등을 쉽게 느낄 수 있는 사회였는데 그때 저는 ”힘든 사람들은 이렇게 돕는거구나“ 하는 깨달았어요. 2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수잔’이 공부한 ‘뉴욕 콜럼비아대학교 사회복지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입학 후 힘든 일이 많았지만 원하는 공부를 해서 그런지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사회학을 전공 했는데 상당히 추상적이라 어려웠는데, 사회복지실천은 바로 눈앞에 해결해야하는 숙제가 있고 해결과정에서 자신의 가치와 진정성,유능감 등이 느껴져서 좋더라고요. 사장이 아니라 멋진 ‘Social Worker’, ‘Social Engineer’가 돼야 겠다고 결심했죠.
-미국에서 일하면서 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American Dream을 가지고 미국에 와서 하루에 12간 이상 일을 하면서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같은 교민들에게 속아서 도박에 빠지고 힘들게 번 돈을 다 날리고 급성 약물 중독자가 돼서 거리에 널브러져 있으면 이들이 한국인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뉴욕 경찰들이 우리 기관에 보내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보고 돕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약물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인생 끝났다고 했던 시기였죠. 거기서 봤던 약물 중독자들은 피해자였고 누구든지 약물에 중독 될 수 있다는 생각과 중독자에 대한 편견들이 없어진 것 같아요. 중독상태가 문제가 아니라 중독자들을 빨리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돕는 게 급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한국 마약 퇴치운동본부’ 광주약물오남용 센터 기획 운영
교도소 보호관찰소에서 만난 중독자들과 공감하며 쌓은 경험이 가장 귀중한 자료
광주상담센터에서 능력 인정받아 중앙본부 재활센터도 만들어 활동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미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이미 미국에서의 생활이 7년이 넘었고, 더욱이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큰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1996년 결혼을 했고 남편이 근무하는 광주에서 잠시 살게 되었는데 당시 약사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라는 재단 법인을 만들었어요. 박정희 정권 때 장관을 지낸 민관식이라는 분이 재단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40억 이상의 기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마침 부산과 광주에 ‘약물오남용상담센터’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력서를 냈고 광주 상담센터를 제가 담당해서 만들고 책임자로 일하게 됐어요. 미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말 열심히 즐겁게 일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보호 관찰 프로그램과 공부한 관찰관들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바로 보호‘관찰소에 전화를 했더니 너무 좋아했고 마약에 관한 모든 일을 저희에게 맡겼습니다.”
-중독자들과 일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거의 모두 수강 교육으로 만나는 중독자 (저는 의존자 혹은 남용자라고 주로 호칭)들이 자주 저에게 ”강사님, 마약 해봤어요?”라고 질문을 했어요. 당시 저는 30대 초반 젊은 나이였고 그들은 저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저는 “꼭 마약을 해봐야 이런 일을 할 수 있나요? 저는 공부를 하고 왔잖아요.”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런데 같은 질문을 계속 받으니 ‘내가 진짜 마약을 해봐야 저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한데 2년 정도 지나니 그런 질문이 저에게는 “너 내 마음을 알아? 나 죽겠거든.”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그들에게 “네, 저 모릅니다. 알려주세요. 여러분들에게 배워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중독자들과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며 가까워졌어요. 심지어 농담으로 저에게 “윤선생님, 죽기 전에 꼭 한번 마약 해 봐야 돼.”라고 말할 정도로요. 이렇게 그들과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저에게 귀한 자료들이 쌓였습니다.”
- ‘중앙본부재활센터’도 직접 만들었나요?
“광주에서 4년 동안 일을 하는 중 저에게 서울에 올라와 재활센터를 만들어서 운영해보겠냐고 묻더라고요. 물론 저는 “예스”였죠. 당시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의 이사진들은 나이가 거의 제 아버지나 삼촌뻘이였는데, 적은 월급에도 열심히 일을 잘하니까 저에게 일을 맡겼나봐요. 초기 마약중독에 관련된 유관기관과의 네트워크와 서비스 제공에 관련된 일은 다 했다고 얘기해도 이의제기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미국에서 감옥을 대신해 선택할 수 있는 TC(Therapeutic Comminity:치료공동체)를 적용하여 우리가 마약 사용자들의 재활센터를 2002년 5월 개소를 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굉장한 도전이었어요. 약물 중독자들도 정말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에서는 그들을 범죄자라고 인식하고 무서워하니까 감옥에서 나오면 갈 곳이 없었는데 자기들을 위해 시설을 만들었으니까요. 2002년에는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했었습니다.”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글 그냥 NGO 기관으로 뒀다면 더욱 전문적인 기관이 됐을 겁니다. 정부의 개입이 오히려 의욕을 꺽었고 저는 사표를 썼습니다. 10년 뒤 옛 이사의 권유로 ‘마약퇴치운동본부재활센타’ 재건을 요청받았고 최선을 다해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이미 기관과 운영인력들은 가치와 신념을 잃었고 저는 결국 2017년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와 다른 길을 걷기로 결정했습니다.
‘약물 비범죄화정책탐험’이라는 주제로 간 포르투갈 연수 모습 - 사진 윤현준 교수 제공 >
-8년을 일 한 ‘마약퇴치운동본부’를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한국에서는 민간사업을 민간이 알아서 하도록 두지 않고 정부가 최소예산지원으로 국가사업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충분한 예산 지원과 서비스품질관리를 보장해주면 너무 좋은데 특히 마약중독서비스는 명분 쌓기 와 생색 내기에만 신경을 씁니다. 2002년 재활센타 건립 시 식약처에서 1억 정도 예산을 주었고 사무총장 자리에 명예퇴직자를 임명했습니다. 이사장자리는 항상 약사들이 했구요. 예산은 조금 주면서 그들이 항상 하는 것은 구조조정입니다. 사업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기에 당연히 문제가 생기죠. 제가 당시 39살이었는데 늦둥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회사에는 말을 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문제들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박사 논문도 써야 했고, 8년을 일하고 자신감이 많이 생겼었는데 사표를 냈습니다. 식약처에서 내려온 사무총장이 저에게 상당한 신임을 주면서 힘들면 일주일 쉬고 다시 일하자고 해 일주일 휴가를 가지는 동안 신임총장이 여전히 나를 붙잡으면 임신 사실도 알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일주일을 쉬고 다시 출근을 했는데 그동안 총무부장이 총장을 회유를 했는지 총장이 저에게 편하게 결정하라며 잡지않더라구요. 그래서 사표를 쓰고 나왔습니다. 본부는 그만 뒀지만 노무현 정부 때 복지부에서 5급 공무원으로 사회 서비스정책 및 사업을 만드는 일도 했고 지역 본부에 있는 후배 직원들과의 협력으로 꾸준히 약물중독자의 회복을 위한 교육 및 상담을 했고, 사회복지학과에서 사회복지실천 및 약물 중독 강의를 하면서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다시 ‘마약퇴치운동본부’로 돌아가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박근혜 정권 때부터 ‘마약퇴치운동본부’를 공공기관을 만들 기획을 했었는지 사무총장에 식약처 명퇴자가 아닌 과거 한나라당 재정국장을 했던 정치인을 임명 했더라구요. 약사회의 힘을 빼려고 했겠죠. 2015년 약사인 이사가 전화를 해서 저보고 다시 가서 재건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아마 저의 ‘마약퇴치운동본부’에 대한 미련을 아셨던 것 같아요. 이미 기관 이미지가 ‘반관반민’이라며 좋지 않았고 똘똘한 직원들은 다 떠난 참으로 형편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일을 맡기면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마침 기획재정부에서 기관예산 배분평가를 하는데 상황을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예산 조정을 하는데 지방에서 박봉으로 일하는 상담원들을 먼저 챙겨주라는 것과 몇가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강조했고, 그때 그 일을 저는 ‘마약퇴치운동본부’가 다시 약사회가 주도가 되어 일을 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저는 심폐소생술이라고 표현합니다. 저는 재능 기부로 1년에 3천만원 정도의 활동비만 받고 일을 했습니다. 그래도 ‘마약퇴치운동본부’를 위해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기회가 생겨서 그저 좋기만 했습니다.”
-억울한 사연으로 ‘마약퇴치운동본부’를 떠나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2015년 재활센타를 다시 열고 프로그램을 시작 했습니다. 입소자들은 이미 12년 전 그 감사함은 없더군요. 입소자들은 그동안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상당히 생각이 복잡해졌던 것 같아요. 재활센타가 자발적인 입소였기에 잠시 몸을 피하려고만 오는 사람이 있었죠. 중독은 재발이 너무 쉽습니다. 그래서 중독이죠. TC라는 것은 당사자 중심의 회복입니다. 서로가 격려하고 서로가 관리하는 건데 재발이 되면 그 내부에서 권한을 축소하거나 다시 시작하게 하는 학습 훈련장입니다. 그런데 교도소도 아닌 우리 센터의 입소자가 재발이 되면 운영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고 문책을 합니다. 정부의 돈이 들어왔기에 더 철저하죠. 치료적 공동체는 전 조직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두 회복을 지향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당 출신인 사무총장, 법대 퇴직 교수가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중독자들를 이해하기보다는 약사회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공공기관화하는데 더 골몰했으며, 급기야 신임 이사장은 나를 약사회와 동일시하며 의심하고, 사무총장은 상당히 알콜의존이였던 사람이였는데 급기야 나쁜 마음을 갖고 입소한 입소자와 멱살잡이를 하고 그 입소자는 약물을 입소자들에게 권하고 이런 사실은 인턴 방송기자에게 흘려서 난리가 났었습니다. 식약처에서는 누구 하나 책임지게 해서 마무리하려고 하고, 사무총장은 실장인 제가 “당신도 알콜 중독자입니다.”라고 한 것에 앙신을 품고 저를 제거하려고 생활지도사 한명을 회유해서 그동안 윤실장이 결정했던 것들을 낱낱히 적어 규정에 어긋나는것을 찾아 해임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정직 3개월 그리고 계약만료로 끝났죠. 제가 안타까운 것은 회복자들이 그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였습니다. 소신, 정직, 가치 신념 이런것은 중요하지 않고 일단 조직에서 살아남는 거라고 생각했겠죠. ‘마약퇴치운동본부’가 최근 회복자로서 활발하게 일하다 생을 마감한 회복 활동가들을 생각한하면 이제 기타공공기관이 되었으니 더욱 정직하게 일을 하고 한계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중독자 조00씨의 1인 시위를 도우며 ‘중복회복연대’ 만들어 활동
허재현 기자와의 연대로 외연 확장에 많은 도움 돼
중독자들을 음지가 아닌 양지로 끄집어 내어 사회적인 인식 바꿔야
-‘중독회복연대’를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15년 우리 센터에 왔던 중독자 조00씨가 있었습니다. 잘 생활하고 있다가 퇴소 후, 다시 재발하여 교도소에 갔다가 2017년 8월 말에 출소하고 바로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님, 제가 출소를 했지만 다시 마약을 안 한다는 자신이 없습니다. 저 좀 살려 주세요.”라며 1인 시위를 했습니다. 조00씨가 저에게도 도움을 요청했고 저는 몇몇 회복자들과 응원하고 도왔습니다. 이후 관련전문가들과 한 분의 의원 보좌관의 도움으로 국회에서 입법 토론도 하였으나 역시 나름 자신들의 영역확장에만 관심이 있었는지, 성과 없이 없어지게 되었고 저는 회복자들 몇 분과 ‘중독회복연대’라는 이름으로 회복을 이어가자고 결의했습니다.
-허재현 기자와는 어떻게 인연이 됐나요?
2018년 6월에 터키에 갔었는데 네이버에서 기사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허재현 기자 사건을 보게 됐어요. 처음엔 허재현 기자님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굉장히 유명한 기자더라고요. 아는 탈북 사회복지사를 통해 허재현 기자님 연락처를 받아서 터키에서 문자를 보냈고 나중에 통화도 하게 됐어요. 제가 허재현 기자님께 “허재현 기자님, 힘드시죠. 어서 다시 제자리를 찾으셔야죠”라고 얘기를 했고 그렇게 허재현 기자님과 인연이 됐습니다. 같이 활동하면서 외연 확장이 많이 됐어요. 외부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네이버 블로그 운영, 중독자 인권 강화에 관한 기자회견, 공동체 모임, 보호관찰소 수강 교육, 회복가정 방문, 기소 유예 교육, 대학교 특강, 정기모임 등의 활동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회복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아직도 우리 사회는 중독자들에게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독이 문제가 아니라 회복을 얘기 해야 합니다. 마약 중독은 사회적인 질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약 사용자들을 강력범으로 취급합니다. 2002년 처음 재활센타를 개소했을 때 대검찰청 마약부장검사가 저에게 ”아니 젊은 여성분이 그 험한 마약사범과 일을 하냐“고 하더군요. 저는 웃으면서 “그들은 도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5년이 지나 그 검사를 다시 만났는데 그분의 관점이 바뀌었더군요. 그들이 환자여서 치료를 해야한다고 말이죠. 2017년 사회복지공동모금에 ‘약물 비범죄화정책탐험’이라는 주제로 기획서를 써서 8명의 중독전문 사회복지사와 포르투갈 연수를 갔을 때 중독자 부모님들이 “우리 애는 단지 약물로 인해 교도서에 들락거린 약물 환자이지 범죄자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했어요. 포르투갈에서 마약 정책을 시작할 수 있었던 촉발제는 부모 연대였습니다. 실제로 제가 만나 본 젊은 약물 중독자들도 중독 문제만 걷어내면 다른 젊은이들과 다를 게 없어요. 젊은 중독자들도 자기 문제를 알고 있지만 주변에 얘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나 부인, 형제자매와 함께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제일 좋은 조력자는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내 부모가 나의 가장 큰 조력자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어도 약물에 빠질 가능성은 많이 낮아지거든요.”
-회복자들에게 연대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회복자들이 건전하게 계속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회복당사자와 가족들, 전문가가 함께 회복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해 나가면서 회복 문화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퀴어 축제처럼 사회적 동의를 받지는 못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음지가 아닌 양지로 끄집어 내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사회적인 인식도 중독이 아닌 회복에 초점을 둘 수 있도록 해야 그들도 일반 시민들과 같은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회복을 지원해야 할까를 이야기 해야합니다.”
-중독자들의 회복을 돕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나요?
“수강 교육을 해야만 중독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회복자들이 운영했던 재활센터는 다 문을 닫았습니다. 재활센터를 운영했던 중독자들도 단약은 했지만 진짜 회복은 안 됐기 때문입니다. 회복은 쉬운 게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든 원하는 것이죠. 그들의 재발은 중독적 성격이자 행동입니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고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거죠.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교육이 아니라 1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이 끝나면 또 다른 필요한 서비스로 연결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복자와 전문가가 한 팀으로 교육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당사자들과 같은 경험을 갖고 있고 공감할 수 있는 회복자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전문가가 한 팀이 되어 중독자들과 서로 공감하는 전인격적이고 지속적인 서비스가 필요합니다.”
인터뷰 마지막에 윤현준 교수는 “미국은 요즘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중독자들에게 소변을 받아 오게 해서 20주 동안 깨끗한 소변이 나오면 550불을 줘서 처벌보다는 보상이나 동기부여를 하는 거죠. 중독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회복을 향하는 회복 문화를 만들어서 중독자 스스로가 노력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회복을 이야기하는 인생은 행복한 인생이라고 다들 같이 노력하자고 말했다.
< 2023년 법무부 앞 회복지향법 개정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 - 사진 제공 윤현준 교수 >
< 2024년 탈 중독 친 회복을 주제로 한 수강 교육 모습 - 사진 제공 윤현준 교수 >
인터뷰 및 기사 작성 / 정숙 < 리포액트 > 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