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터뷰인터뷰 윤미향 의원 “4년 의정활동 소회요? 솔직히 민주당에 섭섭했습니다...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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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재현기자 댓글 0건 조회 2,357회 작성일 24-05-2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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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윤미향 의원이 의원실에 놓인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사진 촬영에 응했다. 촬영-정숙 기자.


“저는 이제 다시 거리로 나갑니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지난 4년 동안 국회의원으로서 겪은 일만큼 힘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피하지 않고, 한반도에 얽힌 가시덤불을 푸는 것부터 시작하여, 상처 입은 역사를 꺼내 나비의 꿈을 펼칠 것입니다.”


윤미향 의원이 국회에서 지난 10일 마지막 의정 보고회를 가지며 한 말이다. 윤 의원은 '과거사 문제 청산'을 목표로 국회 의원이 됐지만 정의기억연대 회계 부정 및 개인 모금 논란, 부동산 명의 신탁 의혹 등이 불거지며 민주당에서 출당에 이어 제명 조치까지 당했다. 이후 사회적으로 논란이 됐던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으로 복당하지 못한 채 무소속 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마치게 됐다. 지난 17일 <리포액트>가 윤미향 의원을 만나 의정 활동을 마치는 소회와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 보았다.


통과 못 시킨 법안 생각하면 마음 무거워

21대 경험안고 다시 시민운동가로


-의정 활동을 마치는 소감이 어떤가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니 처음엔 몸도 마음도 가벼웠습니다. 그런데 의원실 짐 정리를 하다가 통과 못 시킨 법안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더라도 제가 통과기키지 못 한 법안들을 22대 당선자 중에서 살려서 법 제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계속해야겠구나 생각하면서 짐을 정리했습니다.


-왜 재출마하지 않았나요?

한국 정치 구조 속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4년 내내 보수,우익 정치권과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이후에도 정치를 계속하기로 마음먹는다는 것은 저 자신과 제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국회에 들어올 때부터 저는 시민운동가로 살다 왔기 때문에 국회에서 4년의 경험을 가지고 다시 시민운동 현장으로 돌아갈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총선 도전은 생각 안 하고 충실하게 21대 국회의원으로서 소임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과거사 문제 해결하려 21대 비례대표 출마 결심

부동산 문제 무혐의에도 출당과 제명한 송영길 대표에 섭섭

나를 지켜준 동지는 민주당이 아닌 시민들


-21대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사실은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습니다. 21대 총선이 있었던 2020년이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30주년이었기 때문에 후보 등록 일주일 전까지도 수요 집회를 했으니까요. 당시 민주당이 만든 비례정당인 ‘더불어시민당’에서 과거사 관련한 후보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특별히 추천할 사람이 없어서 추천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총장이 제가 출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여성 운동 선배님들께 자문을 구하고 추천서까지 준비를 해놓고 저에게 출마를 권유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다시 출마를 결심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정부가 있었지만 무정부 상태에 있는 사람처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하면서 느낀점이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와 일본 언론, 일본 우익들이 저희들에게 하는 총공격이 단지 한일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국제 정세와 관련 된 일이고 그것이 바로 과거사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정부는 정부의 역할이 따로 있으니 제가 국회에 진출해서 다른 나라의 의회와 국제인권기구의 협력을 받아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20여명 남은 피해자들이 다 돌아가시거나 제가 없어도 다시는 이 땅에서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는 시스템을 국회에 들어가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출마를 했습니다. 


-정의연 회계 부정 및 개인 모금 논란, 부동산 명의 신탁 의혹 등으로 많은 공격 받았는데 심경이 어땠나요?

국회에서 4년 동안 충분히 기반을 다지고 그 다져진 것을 가지고 임기 후에도  일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의도를 파악한 세력들이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계획했던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4년이라는 시간이 부족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정 활동 절반가량의 시간을 많은 공격에 대응하는 소송에 낭비하게 됐습니다. 대응이 일종의 의정 활동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할 수 없었던 것, 제가 가고 싶었던 상임위원회를 배정받지 못 했던 것 등은 아쉬움과 서운함으로 남습니다.


-민주당에서 출당에 이어 제명까지 됐을 때 민주당에 많이 섭섭했을 것 같습니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당에 방해가 되면 안 되기 때문에 무소속으로 활동하는 것도 의미는 있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민주당이 함께 싸워주지는 못할지라도 지켜보며 응원해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싸워나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얼토당토않은 부동산 문제로 당이 저를 출당 시켰습니다. 당시 국민의 힘 곽상도 의원이 저를 현금으로 집 5채 산 여자라고 공격을 했지만 부동산 문제는 무혐의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검찰이 친정 부모님, 시댁, 외삼촌, 사돈의 팔촌까지 계좌 추적을 통해 자금 흐름을 다 수사해서 무혐의가 됐고 기소도 안 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국민권익위원회 (전현희 위원장)에서 저를 비롯한 출당 명단을 발표했고 오후에 바로 출당을 시켰습니다. 출당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국민의 힘 의원들이 제명을 요구한 상태였는데 거기에 부채질한 것은 당시 송영길 당 대표였습니다. 저에게 어떠한 언급도 없이 송영길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3.1절을 앞둔 2월 28일, ‘윤리특위는 윤미향 의원의 제명을 빨리 처리하라’라고 글을 써서 올렸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민주당에 대한 기대를 접었습니다. 부동산 문제로 출당됐기 때문에 무혐의가 되면 당연히 복당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송영길 대표는 또다시 저에게는 어떤 언급도 없이 현재 진행되는 사건이 정리되면 복당 문제를 검토하겠다는 내용을 언론에 일방적으로 배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송영길 대표한테 “같이 싸워 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부당하게 검찰과 언론의 공격을 받는 것을 옆에서 그냥 지켜만 봐달라는 겁니다. 그것도 못 하겠습니까?”라는 항변의 문자를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제명을 막기 위해 함께 싸워준 동지는 민주당이 아니라 30년간 저를 지켜보신 시민들과 종교계, 해외 동포들입니다. 제명 반대 성명서와 기자회견, 당시 윤리특위 위원장인 김진표 위원장에게 이메일도 보내주시며 끊임없는 노력을 해주신 그분들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빚을 갚는 심정으로 남아 의정 활동을 처절하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송영길 대표가 당을 위해 한 결정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조중동이 아무리 여론을 만들어 내더라도 당이 먼저 나서서 출당을 시킨 것은 조중동에 더 큰 권력을 지어주는 겁니다. 지금도 저는 송영길 대표의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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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5월 10일 마지막 의정 활동 보고회. 사진 제공- 윤미향 의원실


노동자 휴게소 설치법과 성차별 시정 조치 법안은 통과돼서 시행 중

문화예술인들과의 연대는 큰 힘, 잊지 않고 책으로 기록 남길 터


-110개 법안을 발의했는데 가장 의미 있는 법안은 무엇인가요?

환경 부분에서는 난개발을 막기 위한 환경영향평가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현재는 건설을 하려는 기업이 자신들이 원하는 조사 기관에 환경영향평가를 맡길 수 있는데 이를 공탁 제도를 도입해서 정부가 선택한 기관에서 조사를 받게 해서 엄격하게 규제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굉장히 중요한 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동 분야에 있어서는 성차별과 관련된 문제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이 굉장히 협소했고 노동자들이 접근하기에 물리적으로 어려운 면이 많았습니다.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구제할 수 있게 시정 조치 제도를 개정한다든가 과거의 역사이긴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징용 노동자들이 일본 정부에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하거나 일본군 성노예가 되어 피해를 입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주 노동자들의 임금 체불 피해구제법을 만든 것, 그리고 제가 원래 국회에 와서 하려고 했던 과거 역사 속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성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분들의 명예 회복을 할 수 있는 '과거사 젠더폭력법'  그리고 제가 지금도 깊은 사명으로 안고 있는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해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베트남 전쟁 젠더 폭력 진상조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법’을 발의 한 것 등이 있습니다.


노동자 휴게소 설치법과 성차별 시정 조치 법안은 통과가 돼서 시행되고 있는데 환경영향평가법, 과거사 관련법, 작업 중지권, 이주 노동자 임금체불 보장법 등 예산이 많이 드는 경우는 아직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21대 국회에서는 통과가 힘들 것 같은데 22대 국회와 연결해서 제가 직접 찾아다니며 설명하고 호소를 해서라도 꼭 통과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문화예술인들이 많은 응원을 보내고 연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에는 문화예술 분야가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게 정책이 장려됐었는데 윤석열 정부가 시작되면서 문화예술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습니다. 문화예술인들은 감성이 남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상처받고 고난받는 감정을 더 깊이 빨리 느끼는 것 같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 김은성 조각가는 같이 일을 해서 잘 알고 있는 사이지만 그 외에 이정헌, 박찬우, 대니 작가 등은 인연이 없었거든요. 탄압받는 저와 같은 마음이면서 동시에 미안함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박찬우 작가 같은 경우는 ‘미향해’ 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그건 자기 고백이거든요. 그런 작가들과의 연대는 저에게 큰 힘이 됐습니다. 임기를 마치면 민주주의나 민족, 평화, 재난에 대한 문제를 삶으로 살아내고 표현하는 작가님들의 역사를 저술로 꼭 기록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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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고발한 피해자들도 우리 사회의 책임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었던 힘은 김복동 할머니의 무한 신뢰


-정대협 활동을 활발하게 하다가 4년 동안 정대협을 떠나 있던 시기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1998년에 피해자 8명에게 사기, 횡령으로 고발을 당했습니다. 당시 정대협은 연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모금도 안 되고 오히려 공격을 더 많이 받던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순결과 순수를 강조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여자들 개인의 품행이 단정치 못해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것이라는 시선이 많아서 손가락질 받고 살았습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피해자 지원법을 만들어서 1인 15만 원 지원금과 무료 의료보험 지원, 1인 독신은 영구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피해자들은 1인이라고 해도 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는 우선권을 주게 했고 피해자로 확정되면 500만 원을 생활지원금으로 국가가 지원하게 법을 만들었습니다. 피해자 개인에게도 이렇게 지원이 되면 정대협에도 지원이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사실 저희는 유엔에 갈 때도 돈이 없어서 해외 펀드를 해서 가거나 해외 동포들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고 했고 일본을 가면 일본 동포들과 시민단체들에서 다 지원을 해주셔서 활동을 했습니다. 제 통장과 장부를 들고 검찰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조사를 받았습니다. 당시 정대협 수입은 실행 위원 15명이 월 1만원 씩 회비를 낸 매월 15만원과 가끔 대표나 제가 강연을 하고 받은 강연료에서 차비를 뺀 나머지를 후원한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조사가 끝나고 밤이 너무 늦어서 조사관이 저를 데려다 줬는데 차 안에서 고발한 할머니들을 무고 혐의로 고소해야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피해자들이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사람을 믿지 못했으면 옆에서 돕고 있는 우리를 사기, 횡령으로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우리의 책임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사를 받고 수요 집회에서 고발한 할머니들을 마주쳤는데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속에서는 울화가 치밀면서 우울증이 생겼습니다. 당시에 남편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있었고 저는 딸을 낳고 한 달 조금 넘어서 퉁퉁 부은 몸으로 추운 겨울에 수요 집회를 하러 나갔고 일본을 비롯해 여기저기 힘들게 다니며 일을 했는데 내가 왜 이 고통을 받아야 하나 생각하니 계속 눈물이 나고 우울해져서 상담을 받았습니다. 우울감이 지속되면 딸에게도 우울감이 전달될 수 있어 안 좋다고 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쉬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표가 사표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일을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시 돌아온 이유는 검찰 수사관에게 말했던 것처럼 피해자들이 저를 고발한 것은 한국 사회가 그 피해자들을 손가락질하고 배제하면서 생긴 피해 의식이고 그 피해 의식이 가장 가까이 있던 저에게 드러난 것이라는 이성적인 사고가 된 이유도 있었지만 97년에 돌아가신 강덕경 할머니와 한 약속 때문이기도 합니다. 할머니께서 고통이 너무 심해서 눈을 못 감으시면서도 “일본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야 되는데...”라는 얘기를 계속 하셨습니다. 제가 할머니 손을 잡고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일본 정부가 할머니 뜻대로 사죄하고 배상하게 하는 거 제가 포기하지 않고 하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할머니와의 약속이 저를 다시 일하게 만들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1992년 3월부터 정대협에서 일을 시작했고 피해자들 신고 전화를 대부분 제가 받았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직접 신고를 하신 게 아니라 지역 방송에 출연하신 것을 제가 보게 됐습니다. 수소문해서 할머니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했는데 목소리가 아주 차가우셨어요. 그래도 찾아가서 할머니를 만났고 그 만남이 인연이 돼서 제가 할머니를 운동으로 끌어왔습니다. 1998년에 제가 정대협을 그만둘 때 할머니도 서울에 계시다가 고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제가 2002년에 다시 돌아와서 할머니를 찾아갔고 할머니도 저와 다시 활동을 시작하셨어요. 할머니와 동지처럼 함께 일하면서 “신뢰를 받는다는 게 이렇게 사람을 신나게 만드는구나”를 절실히 느끼게 됐습니다. 저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늘 할머니께 물어봤어요. 그러면 할머니는" 내가 선두에 서겠다."며 저를 100% 믿어 주셨어요. 김복동 할머니께서 2012년 ‘나비의 꿈’ 기금을 만들고 "세계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우리 이름으로 지원 하겠다"는 선언을 하시고 직접 무대에 올라가셔서 저를 가리키며 “여러분, 나비의 꿈에 기부 많이 해주세요. 기부하면 10원도 경상비(매년 반복 지출되는 경비로 수도료, 전기료 등의 공과금) 안 씁니다. 그대로 지원하는 데 쓰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해자와 함께하는 운동에 있어서 피해자의 지지와 신뢰를 받는 것처럼 신나는 일이 없죠. 이용수 할머니께서 저를 공격하셨을 때 정말 죽고 싶었던 생각이 들었던 이유도 피해자로부터 공격을 받으니까 지난 30년을 잘못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큰 상을 주셨습니다. 기부금인 수표를 들고 “이 돈은 재일 조선인학교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줘라. 이거 대표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알아서 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증거를 남겨야 본인이 죽어도 오해할 사람이 없을 거 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늘 사람들에게 “우리 대표도 상금 받을 수 있는데 추천을 좀 해주면 안 되나?”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그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뒤에서 일은 제가 다 하고 상은 할머니들을 받게 해드린 것 에 대한 미안함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이런 말 한마디가 저에게 격려이자 칭찬이 된다는 걸 아셨던거죠. 


피해자분들과의 약속 지키기 위해 목회자의 꿈 포기하고 사회 운동가로 활동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고 사는 부모님 보며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 가져


-목회자의 꿈을 가졌던 신학도가 사회 운동가가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교육을 하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를 더 공부하고 싶어서 87년에 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 기독교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공부하던 중에 기생 관광 문제(성매매 목적의 관광)에 대해 알게 됐고 마침 제가 몸담았던 한국 기독교 장로회 여신도회 전국연합회가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을 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역사 속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92년 정대협 간사로 일할 때만 해도 목사가 되는 것을 포기한 건 아니였는데 피해자들을 만나게 되고 피해자들을 돕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사의 길이 아닌 사회 운동가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을 많이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기독교 집안이다 보니 신앙생활 속에서 나보다는 늘 이웃을 배려하고 집에 찾아오는 거리의 손님을 극진히 모셔야 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배웠습니다. 가훈이 ‘참’인데 참되게 사는 게 참이 아니라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내가 많이 가지면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고 사는 게 참되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 부모님을 보면서 배웠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고등교육은 못 받으셨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게 사셨습니다. 지금도 두 분이 공원 청소일을 하며 지내는 근면 성실한 분들입니다. 아무리 학교에서 교육제도가 잘 돼 있다고 해도 가정 내에서 인성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경쟁주의나 돈만 추구하는 사회로 변화되고 사회 전반적인 것이 깨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정 교육속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얼마 전 딸이 결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딸에게 빚이 많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친정에 맡기고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실무자가 저 혼자였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딸이 고3 때까지도 생일날 밥 한번 먹여본 적이 없었고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야 함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때문에 자기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는 과정과 전액 장학금을 받는 과정까지 본인 스스로 다 알아서 했습니다. 딸은 방학이나 시간이 날 때마다 사무실에 와서 자원 봉사를 했습니다. 제가 바빠서 봉사하는 시간이 저와 가장 오래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원금으로 딸 유학을 보냈다, 반미하면서 미국으로 딸을 유학 보냈다는 흉악한 보도들이 나기 시작하고, 기자들이 UCLA까지 찾아가서 동포 사회를 시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뉴욕 대학원 최고 연주자 과정에 합격해서 등록까지 마친 상태였는데 결국은 등록을 취소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제 딸 곁에서 저희 가족이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격려를 해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그 둘을 보고 있는 것만 해도 기분이 너무 좋고 안심이 됩니다. 


‘김복동의 희망’을 키워 더 적극적인 시민 활동에 매진할 계획

과거사 청산을 위한 시민 지원군들과의 적극적 연대 필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저는 김복동 할머니께 큰 빚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빚을 할머니가 원하셨던 세상을 만드는 일로, 제 활동으로 갚아 나가려고 합니다. '김복동의 희망'이 할머나의 정신을 이어 받아 이 땅에 평화를 만드는 운동 그리고 베트남 전쟁 참전 한국군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베트남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 운동과 재일 조선인학교 학생들의 차별을 중단시키고 교육을 지원하는 운동 등 지난 40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왔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그 일을 지원하려고 합니다.  '김복동의 희망'은 후원 회원이 지금 300명도 정도라서 운영 자체가 너무 힘듭니다. 그동안은 서울시에서 하는 공용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고 일을 했는데 서울시에서 나가라고 해서 이제 겨우 5평짜리 사무실을 월세로 얻었습니다. 여러분께 ‘김복동의 희망’ 후원 회원이 되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한 달에 5천원도 좋고 1만원도 좋습니다. 정회원이나 후원 회원이 되셔서 '김복동의 희망'에 적극적으로 권리를 행사하여 저와 함께 동지로 활동할 수 있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룰 마치며 윤미향 의원은 ​"제 사건으로 지역에서 하는 운동도 많이 힘들어졌고 전국 각지에 세워진 소녀상들이 계속 공격을 당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윤석열 정부가 아무리 소녀상을 눈엣가시로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소녀상이 평화의 상징으로 우리 삶에 깊게 뿌리 내려야 한다”며 “의정활동은 끝나지만 거리에서 더 열심히 활동하겠다. 과거사 청산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들과 함께 연대하는 시민 지원군을 만들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인터뷰 및 기사정리 / 정숙 <리포액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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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동의 희망 공식 웹사이트 사진 >


‘김복동의 희망’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이며 인권평화운동가인 김복동 할머니의 삶과 뜻을 이어받아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 ‘김복동의 희망’ 후원회원 신청 *

http://kimbokd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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