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터뷰인터뷰 “지금 <더 탐사>는 진실 위한 전쟁터...지치지 않고 앞만 보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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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재현기자 댓글 0건 조회 6,185회 작성일 23-01-20 15:48본문
[사진설명] 권지연 <더탐사> 기자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 <더탐사> 사무실 앞에서 <리포액트>의 인터뷰와 사진 촬영에 응했다.
스토킹범죄처벌법 위반 혐의, 공동주거침입 혐의, 보복범죄가중처벌 혐의. <시민언론 더 탐사> 기자들이 한동훈 법무부 장관 자택을 한 번 방문한 뒤 씌워진 3가지 혐의이다. 취재 목적의 자택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두번이나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해 언론사 사무실은 물론 기자 개인의 집 현관문을 뜯고 집안으로 들이닥치는 일이 발생했다. 검찰은 강진구 기자·최영민 피디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도 했다.
<시민언론 더 탐사>에서 맹활약 하고 있는 권지연 기자를 만나, 기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현재 ‘시민언론 더 탐사’를 향한 언론 탄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권 기자는 <더탐사> 로 이직하기 전까지 <평화나무>에서 뉴스진실성 검증센터장을 맡아 기독교계 각종 비리를 취재해 우리 사회에 널리 이름을 알린 바 있다.
“압수수색 나온 경찰이 내가 무슨 가방 들고다니는지까지 미행하며 관찰했더라”
-‘청담동 술자리 게이트’ 사건 보도가 큰 화제였습니다. 첼리스트가 남자친구와 나눴던 대화내용을 부정하고 있잖아요. 권 기자가 첼리스트를 직접 만나기도 하셨는데, 이야기를 나눌 당시 첼리스트의 심경은 어떻게 느껴졌나요?
“처음에 제가 기자인 걸 모르고 만났을 때는 누구라도 말할 상대가 필요하다는 느낌이었어요. 윤석열·한동훈을 봤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많은 얘기를 했는데 제가 기자인 걸 알고 만났을 때는 전혀 다른 얘기를 했잖아요. 저도 만나고 나서 혼란스러웠어요. 그래서 발언들을 한번 다 정리해서 비교를 해봤거든요. 앞뒤가 안 맞는 내용들이 계속 보이는 거예요. 그 이후 첼리스트 트위터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들이 제보로 들어왔는데, '(한동훈 윤석열을 봤다고) 거짓말을 해서 너무 무섭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대화 내용들이 아니더라고요. 그동안의 맥락을 보면 오히려 제가 기자라고 밝힌 날 저한테 얘기한 것들이 진실되지 못한 정황들이 계속 보였어요. 그동안의 챌리스트의 발언을 정리해서 강진구 선배가 취재했던 거랑 맞춰보고 나서, 덮을 사건이 아니라는것에 동의를 했어요. 윤석열·한동훈은 알리바이를 하나도 안 대고 있잖아요. 저희가 언론에 공개하지 않은 내용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덮을 일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부에서는 ‘청담 게이트’ 사건 보도가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첼리스트의 반론을 듣기 위해 강진구 선배가 노력했지만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원치 않게 챌리스트와의 대화가 공개된 거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챌리스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다만, 이건 취재과정의 올바름에 대한 저널리즘적 고민의 영역일 뿐, 보도의 진실성 여부를 다툴 때 고려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제보가 강진구 선배에게 처음 온 거였는데 '강 선배가 아니라 나한테 온 제보여서 내가 이 취재를 하게 됐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을 해봤는데 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아요. 검증을 많이 거쳤고 저희가 논의해서 '이 정도면 보도해도 되겠다'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첫 보도 때 근거가 미흡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저희가 무책임하게 한 번 보도하고 마는 게 아니라 이후에도 시민들과 함께 추적하고 제보를 받아서 계속 취재하고 있잖아요. 저희는 보도물로 한 편 나오는 거 이상의 내용들을 끌어냈다고 생각해요. 언론사가 단독으로 취재물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의혹을 제기할 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해서 시민들에게 알리고 같이 취재하는 방식입니다. 탐사보도의 한 유형인 '크라우드 취재방식'인 거예요. 저희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조언도 들어가면서 조금 더 가다듬어야죠.”
-지난 12월 취재를 위해 찾아간 한동훈 법무부 장관 자택의 벨을 눌렀다는 이유로 ‘더 탐사’ 사무실과 기자들 자택이 14번 압수수색을 당하고 심지어 구속 영장이 청구되는 사건 그리고 기자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사찰한 정황이 드러났는데 당시 상황은 어떠했나요? 가족들도 많이 놀라셨을 것 같은데요.
“예상을 못 하고 있었어요. 저를 신체 압수수색 하겠다고 찾아온 경찰 4명을 집 앞에서 만났는데 '올 게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휴대폰 녹음부터 켜고 뺏길까봐 주머니에 넣었죠. 제가 경찰들에게 '한동훈 장관이 압수수색 받으면 나도 받겠다'라고 하니까 붙잡지도 않더라고요. 경찰들도 저한테 압수수색 하겠다고 요구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 집으로 압수수색 하러 왔는데 수사관들이 제 방을 뒤지다가 “이게 어제 들었던 가방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가방을 카메라에 노출시킨 적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요즘은 사찰 당할까봐 배려 차원에서 친구도 못 만나요.”
“CBS에서 상받았던 프로그램 기억나...시민들 목소리 전달할 때 가장 신났어요”
-권 기자의 인간적인 면모도 궁금해요. 권지연 기자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권지연은 어떤 아이였나요?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혼자 속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였고 말도 없고 내성적인 아이여서 부모님이 학교 가서 친구들과 잘 어울릴까 걱정을 하셨데요. 그런데 그런 걱정을 다 뒤집고 삼총사를 조직해서 여학생들을 괴롭히는 남학생들을 응징하기도 하고 회장도 많이 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이 쫄딱 망했어요. 집이 망하기 전에는 아빠가 용돈을 진짜 많이 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아빠한테 “아빠! 내 교육을 망치지 말아줘!”라고 하고 이제 내가 아빠의 구두를 닦겠으니 그 대가를 용돈으로 달라고 얘기를 했었거든요. 어릴 때부터 스스로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에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못 미치는 어른들이 있으면 “난 저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도 했었어요. 집이 망하기 전에 저를 너무 너무 예뻐했다가 집이 망하니까 저를 미워하던 그 선생님을 보면서 유치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저는 교회 가는 걸 너무 좋아했어요. 저희 집에 예수님 사진이 걸려 있는데 그 사진을 저희 할아버지가 그리셨어요. 할아버지가 정말 예술적인 재주가 많은 분이셨거든요. 예수님 사진을 보면서 조그만 애가 사진속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듯이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며 혼자 중얼중얼 거리니까 집에서 저를 권 전도사 라고 부르기도 했었어요.”
“저를 만든 토대는 교회였고 외할머니 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외할머니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많이 따르지만 감사함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요. 집이 망하기 전에 저를 너무 예뻐하고 부모님께도 호의적인 사람들이 한순간에 바뀔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부모님의 재력 때문에 내가 사랑을 받은 거였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때 세상을 좀 알게 된 거죠. 돈이 없거나 밑바닥까지 갔을 때 사회적인 평가가 이렇게 저하될 수 있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를 알게됐어요. 그런데 감사했던 것은 신앙이 있어서 그런 사람들이 원망스럽진 않더라고요. 초등학교 5학년 때 혼자 기도하면서 썼던 편지가 있어요. 우리 집이 물질적으로 어려워졌지만 부모님이 우리 삼 남매를 버리지 않으신게 너무 감사하고 부모님이 재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감사하다는 내용인데 어떻게 보면 그때 기억이 저를 지금까지 지탱해 주는 큰 힘인 것 같아요. 다행히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을 너무 잘 만나서 선생님들한테 실망했던 마음도 많이 회복했어요. 중, 고등학교 때는 언니가 아파서 언니 중심이었어요. 가족들이 그거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던 적도 없었고 언니가 빨리 건강해지는게 기도 제목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을 잘 도와드리기 위해 애썼고 제가 스스로 제 물건을 별로 사본 적이 없고 사달라고 해본 적도 없어요. 사실 저한테는 사춘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사춘기는 저에게 사치였죠.”
-기자가 되기 전에는 방송을 주로 했는데 방송인이 되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요?
“중학교 때부터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진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외할머니를 너무 좋아해서 아빠가 퇴근길에 저를 데리러 와도 할머니랑 산다고 아빠를 돌려보내고 외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거든요. 외할머니가 새벽 4시에 일어나시면 CBS 라디오를 틀어놓고 기도를 시작해서 밥하시고 일을 하셔서 저도 똑같이 생활을 하다보니까 라디오 쪽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묻지마 폭행을 당해서 제 눈 밑 뼈가 인공 뼈예요. 그 당시 입원해 있을 때 목사님이 교회에서 보내는 대학에 저를 보내라고 엄마한테 계속 말했는데 엄마도 저도 싫었지만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목사님 뜻대로 갔어요. 제가 신학을 전공했는데 예전에는 신학을 한다고 하면 사모가 되거나 선교를 했는데 저하고는 절대 맞지 않아요. 그런데 그 해 IMF 직전 집이 한 번 더 크게 망했거든요. 그래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차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학교 선배들이 참 순수한 분들이었고 저를 ‘예쁜 이’라고 부르면서 같이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어서 큰 힘이 되었어요. 정말 가기 싫은 학교였는데 그런 사랑을 받으면서 제가 조금씩 회복이 된 거죠. 그래서 학교 가는 것이 너무 좋았고 3학년 때까지는 진로 고민 없이 다니다가 4학년이 됐을 때 아차 싶더라구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군부대 사역도 열심히 다니고 주어진 상황에 열심히 살았는데 앞으로 내가 뭘 해야할지 진짜 고민이 되더라고요. 대학교 3학년 때 CBS에서 아카데미생 모집 광고가 나왔어요. 빨리 등록해야 할 것 같은 데 엄마한테 말은 못 하겠고 체념을 하고 돈을 모아서 다음에 등록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가 고민이 있는걸 엄마가 아시고 무슨 고민이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래서 CBS 아카데미에 등록을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엄마가 바로 CBS에 가서 담당하는 사람하고 할부로 등록할 수 있게 담판을 짓고 오셨어요. 그래서 등록을 할 수 있었어요. 그때 변상욱 선배를 비롯해 좋은 분들을 만났어요. 아카데미 끝날 때쯤에 리포터 모집을 한다고 해서 시험을 봤는데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서 체념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CBS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는 다른 방송사는 관심도 없었고 시험을 본 적도 없어요. CBS 들어가는 게 제 목적이었거든요. 교통 캐스터를 뽑는 자리였는데 보수가 적은데 괜찮겠냐는 말에 당연히 저는 당장 가겠다고 했죠. 사실 저는 길치거든요. 지금은 CCTV가 도로별로 정리가 잘 돼 있는데 제가 처음 갔을 때는 뒤죽박죽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지도를 다 그려서 막히는 부분을 수 백개의 CCTV를 찾아서 다 외우고 그 방향을 파악해 공부를 하면서 방송을 했어요. 어느 날 아나운서부에서 저를 맡으셨던 선배가 부르셔서 “원고가 너무 좋다. 보니까 방송도 잘하는데 왜 이렇게 자신 없게 하냐?”고 기죽이지 않고 용기를 많이 주셨어요. 제가 자신감이 없으면 방송할 때 목소리가 작아지거든요. 그 이후부터 제가 180도 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제가 너무나 존경하는 분입니다.”
-소비자 경제 신문, YTN 생생 경제 컨슈머 저널리스트, 팟캐스트 김용민 브리핑, 카이로스 패널, 평화나무 기자,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 아나운서학과 전임교수, 기독교 방송, SBS, KBS, YTN, TBS 등에서 시사 전문 취재 리포터, 경기방송 ‘발로 뛰는 진행자 권지연의 시사매거진 의정 24시 MC ’, 북방선교방송 ‘함께해요, 이 밤’ PD 겸 MC 등 많은 분야에서 활동 했는데요, 방송인으로서 권지연의 삶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2004년에 TBS로 이직하고 2006년에 아빠가 의료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당시 남동생은 학생이었고 언니는 몸이 아파서 진짜 가장이 된 거예요. 아빠가 사업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빚이 많이 남아 있었고 가족들 생활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미친 듯이 일을 했어요. 그런데 다행히 여러 곳에서 제의가 많이 들어 왔어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은 다 저를 거쳐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제가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세팅을 하고 나머지는 후배들한테 넘겨주고 특집 같은 거는 제가 팀을 꾸려서 갈 정도였어요. 라디오에서 취재하는 리포터들이 문어발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제가 최초였어요. 방송사에서는 싫어할 요소인데 저는 더 악착같이 실수없이 일하려고 정말 열심히 했는데 리포터들끼리 시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때 눈물을 좀 흘렸었죠. 제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가 여기까지 오면서 다른 기자들처럼 출입처를 정해서 도제식으로 일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출입처 보도 자료 쓸 일이 없는 장점이 있더라고요. 라디오 구성을 들어갈 때는 제가 아이템을 선택해서 취재를 하고 구성도 해야 되니까 구성 작가 역할도 해야 하고 PD처럼 상황도 컨트롤 해야 하고 출입처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 CBS나 TBS 같은 경우는 신입 PD나 기자 교육을 저한테 하라고 했어요. 현장을 많이 뛰었기 때문에 제 이력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지만 후배들에게 나의 특이한 이력이 좋지 않게 보일까 걱정도 했는데 오히려 저를 잘 아는 선배들이 아나운서, PD, 기자의 역할을 다 해본 이력은 흔치 않다고 응원해 주는 분들이 계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제가 처음 했던 게 복지 프로그램이었는데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프고 가난하고 힘없는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사연을 듣고 공감하다 보니까 사회나 정치의 잘못된 부분을 보는 눈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저도 부유했던 적도 있고 망해서 힘들게 산 적도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아픔을 들었을 때 대부분이 저도 겪어본 일이라서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아지잖아요. CBS에서 상을 받았던 ‘택시 뉴스’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택시 기사가 질문하는 것처럼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내용인데 제가 좀 엉뚱한 면이 있어서 시민분들을 웃기다 보니까 인터뷰가 항상 재미있게 진행이 됐어요. 그래서 호응이 되게 좋았죠. 지역마다 찾아다니면서 계속 민심을 듣는 것이 의미가 있었어요.”
[사진설명] 전광훈 목사에게 질문하러 갔다가 신도들에 둘러싸여 폭행당하던 권지연 기자.
권지연 기자는 왜 전광훈 목사를 집요하게 추적하는가
-평화나무에서 기독교 관련 중요한 취재를 많이 했는데 평화나무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용민 이사장의 뜻에 공감한 부분도 있지만 김용민 이사장의 진심을 봤기 때문입니다. 여러 면에서 본이 되는 좋은 선배를 만나 저에겐 행운이었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평화나무에서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의 비리를 취재했는데 그중에서도 전광훈 목사에게 주목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평화나무에 가기 전부터 전광훈 목사 모니터링을 했어요. '막말도 많이 하고 이명박을 안 찍으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린다'고도 말하는 등 엄청난 정치 목사인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CGN TV에 있었을 때도 '전광훈 관련 취재는 보이콧이 답이다'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전광훈이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이 된 거예요. 저기서 사고가 나겠구나 싶어서 계속 모니터링을 했어요. 평화나무에서 1분기 업무 보고를 하는데 계획서에 그냥 딱 이름 석 자를 적었어요. ‘전 광 훈’.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게 사고를 치더라고요. 전광훈이 기자회견을 크게 열었었는데 저는 다른 취재가 있어서 후배 기자가 가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마침 제가 가려던 취재가 취소가 돼서 제가 그 인터뷰 장소에 가보니 교계 기자들은 전 목사 취재거부 하느라 아무도 없고 사회부 기자 초년생들만 있었어요.
말도 안 되는 전광훈 발언을 그냥 다 받아쓰기할 것을 생각하니까 안 되겠구나 싶어서 발언자들 질문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들고 질문을 했는데 전광훈의 ‘나가!’ 한마디에 전광훈 지지자들이 저를 던졌어요. 폭행까지 당한 마당에 싸워야 되잖아요. 그러다보니 평화나무가 어쩔 수 없이 전광훈 전문 추적단체가 된 거예요.”
-작년 9월 전광훈의 ‘사랑 제일 교회’에서 집단 폭행을 당하셨는데 이후 법적인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사랑 제일 교회’ 측에서 저를 업무방해로 고소한 거는 무혐의 처분되어 끝났고요. 저를 폭행했던 사람들은 검찰에 송치가 되었어요. 그런데 전광훈은 아예 조사를 하지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따로 고소장을 제출했습니다. ”
-신앙인으로서 기독교 내의 비리를 취재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어떤 심정으로 취재를 했는지요?
“교회에 길들여지면서 여러 피해 본 사람들을 제대로 조명해 주는 기자가 아무도 없었어요. '너무 나약한 힘이지만 나라도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했는데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나요.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해야죠. 김명진 목사가 ‘빛과진리교회’ 교인들에게 인분을 먹인 사건 취재할 때는 '교회가 어떻게 이런 수준이 되었나'라는 생각에 길 가다가 주저앉아 운 적도 많아요. 종교폭력 피해자들은 신앙생활을 잘해보고 싶은 욕심에 교회에 길들여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에요. 피해자들이 그런 일을 외부에 고발할 때는 자기가 입은 피해를 다른 사람들이 더이상 겪지 않고 지금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도 구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 마음을 알기 때문에 취재를 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저도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것도 있었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취재를 했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취재가 있나요?
“아주 오래전인데 장애인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한 소년이 있었어요. 달동네도 아니었는데 단칸방은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악취가 났고 방바닥은 장판 밑에 이것저것 깔려 있어서 울퉁불퉁해 도저히 앉을 수도 없었어요.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는데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게 이상했죠. 그래서 관공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었어요. 몇 년 뒤 그 소년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저 이사했어요. 감사합니다.”라고. 제가 그 소년을 만났을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수의사의 꿈을 꾸고 있었어요. 엄마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고 자신의 환경에 전혀 불평하지 않았는데 어떤 어른이 됐는지 궁금합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기자인데 더 공부하고 싶은 분야나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CGN TV에 있을 때는 국제 뉴스를 접하는게 좋아서 국제대학원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경제지에 있을 때는 경재분야에 관심이 갔었고 대북 방송도 잠깐 했었는데 그때는 국방대학원에 가보고 싶었어요. 제가 전문 분야는 없지만 반대로 많은 분야를 공부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단순히 기사를 쓰는 거 말고 다큐멘터리 작업에도 많이 참여했었기 때문에 호흡이 긴 다큐멘터리 작업을 좀더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환경 쪽이나 통일을 대비해서 북한 관련한 공부도 해보고 싶습니다.”
-권지연 기자의 인생의 가치관은 무엇인가요?
“저는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방송이 너무 하고 싶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방송사에서만 일했잖아요. 그래서 방송을 그만뒀을 때 아쉬움이 있었죠. CGN TV를 나오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어요. 그때가 제 나이가 마흔하나였는데 '조금만 더 나이 먹으면 그곳에서 언론인이 아닌 직장인으로 살아야겠구나'라는 고민을 했어요. 퇴사 후 쉰 기간은 딱 일주일인데 그때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짓을 한 걸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론 잘 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CGN TV를 퇴사하고 지면 기사를 써보는데 방송을 그만둔 것이 전혀 아쉽지 않더라고요. 나는 방송을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취재한 것을 잘 알리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가치를 실현하는 게 중요한 사람이지 방송이 절대 목표는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기자들은 항상 무엇을 물어볼지 질문을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혼자서 부딪히며 배운 것은 무엇을 질문할지보다 어떻게 다가가느냐가 중요하더라고요. 제가 취재할 때 굉장히 신경 쓰는 부분이에요. 질문의 내용보다 내가 어떻게 다가가느냐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0년 뒤 '사람 권지연'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저는 <더 탐사>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전쟁터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 온 측면도 있었어요. '나 같은 사람 한 명의 힘이라도 보태면 좋겠다' 싶은 생각으로 왔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다른 일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예전에 학생들 가르칠 때 좀 더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싶어서 진로 자격증과 스피치 자격증을 땄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면 학생들로부터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선생님이 되고도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른 생각하지 않고 앞만 보고 가려고 해요. 지칠 때도 있지만 좋은 세상 오면 결혼도 하고 연애도 하고 싶어요.”
-현재 <더 탐사>가 당하고 있는 언론탄압을 보고도 함구하고 있는 같은 언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검찰 공화국이 왔구나' 실감이 납니다. 한동훈 장관 스스로가 압수수색을 거부하면서 일어난 몸싸움을 독직폭행으로 고소하고 자신의 휴대폰 비밀번호를 24자리로 걸어 잠그고는 헌법상의 권리라고 합니다. 자신을 취재하는 기자들을 스토킹범으로 몰고 심지어 압수수색을 14차례 강행하는 것을 보면 실소가 나옵니다. 한동훈 장관은 ‘조선 제일 검’이 아니라 ‘조선 제일 졸장부’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한동훈 장관의 말을 받아쓰기하고 조선일보의 프레임에 부화뇌동 하면서 ‘더 탐사’를 향해 지적질 하는 언론들을 보면 짜증이 납니다. 비단 ‘더 탐사’만 미운 오리 새끼처럼 대하는게 아니라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일반적으로 TV,라디오, 신문 등이 해당) 사이에서도 탄압에 저항하는 끈끈한 연대 의식 자체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검찰도 언론도 스스로 개혁의 대상임을 몸소 입증하며 나락으로 빠져들었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나 하나라도 정신 차리자’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겁내지 말고 당당하게! ”
-검찰 독재 정부를 견뎌내고 있는 시민들에게 응원의 한마디 해주세요.
“우리 국민들은 정말 강하고 수준 높은 민족인 것 같아요. 취재를 하면서 뭔가를 많이 전해 줬다기보다는 오히려 진짜 많이 배우고 얻었다고 생각해요. 우리 국민은 정말 위대한 국민이기 때문에 이런 시기를 잘 버틸 거라고 생각합니다. 촛불 집회를 계속 하고 있는데 사실 이쯤 되면 사람들이 지칠만도 한데 다들 대단하세요. 눈에 보이는 변화도 딱히 없고 모든 영역이 다 무너지고 있잖아요. 저는 이 싸움이 장기체력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치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밀고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취재/정숙 <리포액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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