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저널리즘 연구 피해자중심주의에 대한 언론의 무지와 오해가 '경향신문 사태'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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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재현기자 댓글 0건 조회 5,560회 작성일 20-08-1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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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 '박재동 화백 미투 사건 의혹' 보도를 한 강진구 탐사보도 전문기자를 12일 인사위원회에 회부해 징계 여부를 결정할 예정입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경향신문 독립언론실천위원회(위원장 유희곤)등 경향신문 기자들 다수가 강 기자의 징계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가짜 미투 의혹제기 자체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는 주장입니다. 강 기자는 평소 경향신문 편집국 내부에서 검찰 개혁 등과 관련한 자사 보도 등에 불편한 문제제기를 해왔습니다. 이점도 여론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됩니다.


제 주변 언론인들 사이에서는 보도만으로도 2차 가해 책임을 물어 징계를 하는 게 온당한 것이냐는 비판이 많습니다. 엄혹한 유신독재시절에도 기자들이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며 '과도한 검열'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이제는 기자들 스스로 특정 여성주의를 절대진리처럼 앞세워 자기검열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강 기자의 편에 서면 자신도 마치 '반여성주의자'처럼 낙인찍힐까 두려워 기자들 대부분 이 사안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는 않고 있습니다.


사실 피해자중심주의 논란은 언론인들이 십수년간 진행돼온 '여성주의 내부 논쟁 과정'을 조금만 체크했어도 이정도까지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대중 여성운동가 벨 훅스는 "페미니즘 이론이 학계라는 게토에 안주하면서 그 외부와의 연결고리가 약해졌다. 학계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러한 통찰들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부작용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 가해' 개념과 용어에 대해선 여성주의 내부에서조차 2004년부터 비판적 문제제기가 계속 진행돼 왔습니다. 우리 언론이 되레 이를 따라잡지 못했고, 불행하게도 특정 여성주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기자들 단속에까지 나선 상태입니다. 세계 저널리즘사에 부끄러운 일로 기록될 것입니다.



■ 피해자중심주의는 원칙이 아니라 캠페인이었다

먼저 피해자중심주의 용어가 어떻게 나온 단어인지 살핍니다. 이 말이 처음 대중에 소개된게 2000년대 초입니다. 90년대까지 대학총학생회,노동조합,사회운동단체 등 곳곳에서 성폭력 사건이 만연해 이를 바로잡기 위해 사회운동가 100여명이 모여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 100인 위원회'를 만들었고 2000년 7월부터 2003년10월까지 활동했습니다. 


이 위원회 활동의 가장 큰 성과는 '피해자 경험에 기반해 성폭력을 이해해야 한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그때만 해도 사회분위기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해자의 주장을 지나치게 수용한 나머지, 마치 '피해자도 조심성 있게 행동했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사회가 피해자의 경험을 집단적으로 공유하거나 인식해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한계였습니다. 


100인 위원회는 발간한 백서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폭력 사건의 특징이 사적인 자리에서 은밀히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또 객관적 증거나 증인의 부재,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반된 기억을 전제한다면,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도 사실 자체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다소 황당한 이러한 주장은, 그러나 당시 진보진영에서 대체로 수용되었습니다. 왜냐면 워낙 성폭력 가해자 시선에 젖어 있는 우리 사회를 성찰하기 위해 내던져진 일종의 '캠페인성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는 건 너무나 정당했고 '피해자중심주의'라는 원칙이 벌써부터 제시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피해자 중심'이란 단어에 '주의'라는 단어가 붙어 '성폭력 사건 조사의 절대 원칙'처럼 변질되어 진보진영에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낀 일부 여성운동가들이 2004년부터 의문을 표합니다. 여성주의 누리집 '언니네'에서 발간한 책 '피해라는 날개와 발톱' 에서, 여성학자 정희진 등이 낮은 수준으로 피해자중심주의의 부작용 등을 거론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다만, 이때만해도 구체적인 논쟁으로까지 확대되지는 않고 '피해자중심주의에 대한 한시적 동의'의 입장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의 말이 진리'라는 뜻이 아니다

2005년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의전화,한국여성민우회 내부집담회에서 '피해자중심주의' 대신 '피해자 관점'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된 바 있고, 2006년 정희진이 '성적자기결정권을 넘어서'라는 글에서는 나아가 "피해자중심주의는 여성주의가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합니다. 2012년 여성학자 전희경은 '공동체 성폭력 이후,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다'라는 글에서 피해자중심주의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되는지 주장했고, 2017년에는 여성학자 권김현영 등이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토론회에서 "폭로중심의 피해자 정치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시작했습니다. 


권김현영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피해자중심주의는 마치 피해자의 말이 곧 진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중략) 2차 가해라는 용어는 진상 조사 자체를 불가능 하도록 남용되었다. (중략) 성폭력 문제의 핵심은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다. 그런데 피해자의 주관적 판단에 해석을 전부 위임하게 된다면, 성폭력은 대체 어떻게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 있으며, 반 성폭력의 정치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이 말은 피해자의 말이 진짜인지 여부를 철저하게 조사하자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가해자의 진술에 대한 해석투쟁의 영역이며, 2차 가해라는 말은 피해자 중심주의와 결합해서 그러한 해석투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피해와가해의 페미니즘,2018)


나아가 그는 피해자에게는 '피해의 증명 의무도 있다'고도 설명합니다. "피해자는 당연히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있지만, 그 경험을 공론의 영역으로 가져올 때는 정당화의 의무를 지게 된다. 페미니즘은 그 정당화 과정에서 해석 투쟁에 연대하는 것이지 무조건 편을 들어주는 언어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손을 들고 피해자라고 얘기하는 것 말고는 어떤 말도 불가능해지고, 결국 아무도 얘기를 듣지 않게 된다. 모든 것을 편들기의 정치로 만든다. 편들기 방식이야 말로 페미니즘 정치와 가장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박원순 서울시장 타계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피면, 권김현영의 이러한 우려는 가볍게 들을 내용이 아닙니다. 서지현 검사가 박원순 시장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격당하거나, 박원순 시장의 타계를 추모한다는 이유만으로 '너는 누구 편에 있느냐'는 질문을 들어야 하고, 정의당 장혜영 의원 등이 "저는 피해자 편에 서 있다"고 선언해 마치 박 시장 빈소를 찾는 사람들은 피해자 편이 아닌 것처럼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김재련 변호사는 나아가 "2차 가해(변호인에 대한 공격) 침묵도 2차 가해"라는 주장까지 했습니다. '미투 사건의 진실 들여다보기'가 아니라, 대중에게 "누구 편에 설 것인지 입장부터 정하라"는 '반여성주의적 압박'들이 '여성주의의 언어'를 입고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성학자 정희진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피해는 저절로 자명한 사실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합의하는 피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원 버스 안에서 발을 밟혔을 때, 친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을 때, 나의 작은 선의가 조롱당할 때 (중략) 공동체에서 왕따를 당할 때, 성폭력을 당했을 때 등등 (중략) 피해사실은 만들어 가야 할 역사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518 광주민주화 운동, 4.3 사건, 세월호 사건이 그러했다. 피해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담론적 실천'으로 발명해야 할 대상이다. (중략) 피해는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니라 투쟁으로 획득 되는 개념이며, 이 과정이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사실이다." (피해와가해의 페미니즘,2018)


여성운동가 최미진은 좀더 나아가 "피해자중심주의는 증거주의로 대체돼야 하고 2차 가해 용어도 사용해선 안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증거는 물증 외에 진술도 포함한다. 객관적 실체를 파악해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무엇보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2차 가해 용어는 피해호소인의 말을 절대화 하는데 이용돼, 진실 규명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사건과 관련한 논의를 가로막고 도덕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논쟁, 2017) 


최미진의 견해는 워낙 급진적이라 여성주의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 상태에 있습니다. 다만 '피해자'라는 용어대신 '피해호소인'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여성운동가라는 점에서 눈에 띕니다. 해외 유수의 언론들은 우리나라처럼 미투 폭로가 있다고 하여 곧장 피해자(victim)라고 표현하지 않고 피해호소인(alleged victim)이라고 지칭해 '거리두기' 보도를 한다는 점에서 봤을 때, 최미진의 '피해호소인'이라는 용어 제시는 국제적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뢰하되 검증하라"는 여성주의 이론이자 언론의 원칙

이렇게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는 여성주의 내부에서조차 그 비판적 성찰과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이 자세한 검토없이 대중에게 '합의된 여성주의 원칙'처럼 제시하는 건 당연히 성급합니다.


경향신문은 강진구 기자의 징계에 앞서 성폭력 사건 조사 때 활용되는 각종 기구들의 원칙을 살펴보는게 좋겠습니다. 미연방고용기회균등위원회(EEOC)가 마련한 지침을 보면, '피해 호소인의 일관성 있는 진술과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입장까지 고루 듣도록'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피해 호소인에게 "(성폭력) 거부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불이익에 대한 우려가 있을 만한 상황이었는지" 조차도 과감히 묻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침은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와 각종 성희롱 고충심의기구 등이 참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권김현영은 각종 성폭력 사건 진상조사위에 참여해 "신뢰하되 검증하라"를 조사원칙으로 제시해왔다고 합니다. 이는 언론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피해호소인의 입장에서 사안을 판단하려 노력하되, 그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검증하는 것은 언론의 상식이고 당연히 '2차 가해'가 될 수 없습니다. 객관적인 '미투 검증 보도'를 악용하는 구체적 사건이 이어져야 '2차 가해'라고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검증 자체가 2차 가해다'는 주장은 그간 여성주의 내부에서조차 언론계에 요구했던 일이 없습니다.


워낙 예민한 주제라, 글을 마치면서 저의 개인적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저는 여성주의 논쟁에 개입하려는 게 아닙니다. 피해자중심주의가 틀렸다는 것도 아닙니다. '박재동 화백 관련 미투논란'은 저도 취재를 이제 막 시작해서 자세한 진실은 모르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성인이 되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문화와 제도의 부작용에 눈뜬 뒤로는, 가부장제 해체를 위한 행동적 삶을 살아왔습니다. 기꺼이 제가 인생을 통틀어 '페미니즘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반여성주의 기자'라고 낙인찍힐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글을 쓰는 건, 권김현영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논쟁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권김현영, 2017)  경향신문 기자들이 일부 여성주의에만 집착하지 말고 모든 사조로부터 신중한 거리두기와 판단을 해야 합니다. "페미니즘이 싫어 테러조직 IS에 가담했다"는 2015년의 '김군'같은 일탈은 어쩌면 우리 언론이 대중에 여성주의를 오인하도록 만든 탓도 큽니다. 언론은 미투의 편에도, 미투 반대의 편에도 아닌 오로지 '진실의 편'에만 서야 하지 않을까요. 대중의 주목을 받는 미투조차 감행하지 못하는 수많은 익명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우리 언론인들에게 바라는 것일 겁니다.




*참조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권김현영,정희진 등),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권김현영),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논쟁(최미진), 페미니즘 지성의 무덤이 되다(이선옥, 경향신문 칼럼),운동사회 성폭력뿌리뽑기 100인 위원회 활동 백서, 피해라는 날개와 발톱(언니네 사이트) 


허재현 <리포액트> 대표 기자 repoac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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